저자서문 김낙호

”’저자서문: 한국만화, 중간 수준의 역사”’

특정 문화 분야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것은 독자나 필자 모두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없는 작업이 되곤 한다. 정치사나 경제사 같이 커다란 함의를 지닌 분야가 한층 쉽게 ‘줄거리’를 만드는 데 비해 만화사 같은 것은 유행의 흐름 정도를 묘사하는 수준에 그치며, 자칫하면 작가와 작품만 잔뜩 나열한 스크랩북이 되곤 하기 때문이다. 혹은 그 문화의 당대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에만 집중하다가 정작 그 과거가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흐름에 던져주는 함의가 무엇인가 하는 고민을 외면하기도 한다. 기록에 머무를 뿐, 역사를 하나의 해석으로 쓰지 못하는 셈이다. 물론 그런 기록물도 필요하다. 하지만 역사를 보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에 대한 함의인 만큼 부족한 부분이 명확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현란한 수사로 두루뭉술 역사적 의의만 잔뜩 뱉어내고 임의로 어설프게 가져다 붙이는 것도 곤란하다. 즉 사료에 대한 집착과 흐름에 대한 해석을 둘다 어느 정도 만족시켜서 오늘날을 파악하기에 가장 적합한 역사 서술이 필요하다. 모든 작업이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만, 이런 중간 수준의 역사 파악이 하나쯤은 있어야 세부 분야를 더 깊게 탐구하고 싶은 이들에게도, 더 종합적인 상을 그려보고 싶은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은 한국만화라는 분야에 대해서 바로 그런 작업을 시도하는 책이다. 시대를 구분하고, 각 시대의 주요 경향과 그것을 형성한 사회적 맥락, 제도장치, 발전과정, 이후 시대에 대한 의의 등을 총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작업의 첫 번째 단계는 이 책에서 다룰 역사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었다. 2009년은 한국만화탄생 100주년으로 여러 뜻 깊은 행사가 있었지만, 여기서는 좀 더 초점을 명확하게 하고자 했다. 문인화, 연환화(連環畵) 같은 동아시아의 그림-글 이야기의 전통은 논외로 하고, 근대적 개념으로 한국에서 만화의 효시로 꼽히는 것은 1909년 신문에 실린 이도영의『삽화』라는 시사만평이다. 하지만 그 후 일제 식민지배에 들어가면서 한국이라는 사회적 맥락에서 독특한 만화문화를 가꾸어나갈 기회가 유보되었다. 일제치하에서도 『만문만화』, 『멍텅구리 헛물켜기』 등 카툰과 코믹스트립이 근대적 신문에 연재되곤 했으나, 식민지 조선이라는 국가와 문화 자체만큼이나 존재 기반이 약했다. 결국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과 함께 한글매체가 폐간되며 한국만화 또한 휴지기를 맞았던 것이다. 이후 한국사회의 맥락 속에서 오늘날의 만화로 이어지는 만화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은 해방과 함께 촉발된 한국어 출판물 붐부터였다. 물론 일제치하에서 만화를 시도했던 일부 작가들이 해방 후 한국만화의 선두로 나선 것도 한 것이 사실이지만, 오늘날의 한국사회로 이어지는 맥락에서 보는 한국만화의 흐름이라는 전제를 놓고 볼 때 이 책에서는 해방 후부터 00년대까지를 다루는 것이 적합하다고 파악했다.

그 다음은 흐름의 큰 맥락을 잡아내는 것이었다. 공저자 사이에 완벽하게 의견일치를 보기보다는 각자의 해석을 어느 정도 동시에 들고 가는 식인데, 그중 필자는 한국만화사의 큰 줄거리를 튀김통 속 같은 강력한 역동의 연속으로 보았다. 해방정국 한국어 출판물 붐과 함께 짧게 맞은 황금기, 어려운 경제 속에 위축된 판매시장과 대본소의 탄생, 거기에서 이어진 장르만화 붐, 유통 독점화와 검열로 인한 질적 위축, 정치적 억압 속 새로운 매체 시도, 주류 오락화와 산업화, 장르 세분화와 원작산업 논리, 또 다시 새로운 매체로 재도전 등 파란만장한 전복의 연속이었다. 큰 흐름으로 볼 때, 50년대 이래로 거의 10년마다 한번씩 꽤 크게 작가•작품군의 세대교체가 있어온 셈이고, 어떤 때에는 거의 세대단절이 일어난 경우도 있다. 50년대의 여러 스타들은 60년대의 공장형 대본소만화 체제에서 밀려났고, 70년대에 내공을 축적하고 80년대에 만개한 여러 장르는 일본만화의 수혈을 직접 받은 90년대의 취향 앞에서 가차 없이 떨궈졌다. 심지어 90년대 종이잡지의 수많은 작가들이 2000년대의 웹 중심 호흡에 새로 적응하기보다 전업을 택했다. 옛 팬들이 구매력을 바탕으로 자기들이 꾸준히 좋아하는 작품성향을 지지하여 가꾸어 나가는 향유자 중심의 다양성보다는, 당대의 산업 조건이나 주요 트렌드에 좌우된 다분히 제작자 중심의 격한 역동과 단절의 흐름인 셈이다. 이에 비하면 어차피 세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탄압과 폄하의 역사 따위는 그다지 돋보이는 요소도 아니다. 이런 역사의 장점이라면 한국만화가 항상 당대 사회상황을 매체양식 자체에까지 충실하게 반영한 진정한 현재형 대중문화, 그것도 가장 기층적인 오락성을 나누는 것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단점은 한국만화가 짧지 않은 만화 역사 속에서 체계적으로 기억과 유산을 축적하여 작품 내용이나 제작체계 면에서 탄탄한 진화를 이루지 못하고, 종종 “바퀴를 재발명”하는 낭비를 벌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결과 한국사회의 좁은 문화적 포용력에 어울리지 않게 한국만화는 다양한 장르가 상당한 완성도로 만발할 수 있었다. 매번 새 판이 짜이면서 반쯤은 거품으로 붐이 일어나 출판사업은 상당한 규모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한국은 경제수준이 비슷한 싱가폴, 대만 등 아시아에서는 물론 서유럽의 여러 나라보다도 훨씬 자국만화의 주류화가 잘 이루어진 편이다. 반면 추억으로써가 아닌 문화예술적 중요성을 강조해 사회적 인식을 가다듬는다든지, 전반적 작가 처우 환경이나 작품 기획력 등 역사 속에서 축적된 노하우가 필요한 부분은 여전히 매번 새로운 출발이다. 장점도 단점도 아닌 뚝배기 역사가 아니라 튀김통 역사를 만들어온 데 대한 인과응보다.

이 책은 역사의 흐름을 통해서 한국현대만화가 오늘날로 이어진 모습들을 보여주고자 했다. 본문에 해당되는 부분은 대략 10년 주기로 시대를 나누어 구성했는데, 각각 시대배경, 창작환경, 작품경향 등을 담아냈다. 전체적으로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한국예술연구소에서 99년부터 진행한 ‘『한국예술사대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작성한 내용의 증보판이다. 박인하 교수가 집필한 전체 개요 및 해방 후부터 80년대까지를 다룬 내용, 그리고 필자가 집필한 90년대 역사 및 이책을 위해 만화산업백서 및 기타 기고문을 바탕으로 새로 쓴 2000년대 역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토막글로 몇 가지 한국만화 미시사를 추가했는데, 그중 필자가 담당한 ‘해적만화사’는 만화비평 웹진 「두고보자」에서 2001년 연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했으며, ‘디지털만화사’는 2009년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연구 보고서 『차세대디지털플랫폼 만화산업연구』에서 논의한 요지 위에 작성하였다. 또한 한국만화 장르 흐름도는 원래 2003년 앙굴렘 국제만화축제 한국만화특별전 도록용으로 작업했으나, 편집 일정이 촉박해서 사용하지 못했던 것에 내용을 추가하여 마침내 선보이는 것이다. 다양한 지면에서 한국만화의 흐름을 알리기 위해 작성한 글들이 이번 기회에 하나의 역사서로 모이는 셈이다.

혹여나 장황한 도입으로 독자님들을 괴롭힌 것이 아닌가 싶다. 본문도 딱히 재미가 넘치리라고 확언할 수는 없으나, 어떤 동기에서든 한국현대만화의 흐름에 관심이 있어 이책을 들게 되신 것이 맞다면 꽤 흥미롭게 읽어보실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역사책이 그렇듯, 다루는 바를 최대한 정확하게 담아내고자 했으나 잘못 알려진 사항들, 부족한 부분들, 또는 기타 여러가지 이유에서 더 포함시키면 좋을 내용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제안에 귀를 열고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의미에서 웹사이트 http://comicstudy.net 를 열어두었으니 많은 분들의 방문과 참여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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